선비는 그 명성(名聲)을 나타 낼 사람이 있고 또한 그 명성을 나타내지 못할 사람이 있다.
그 명성이 나타난 사람은 그 뜻이 드러나 있고 그 행적이 뚜렷한 때문에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서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있는 사람은 그 뜻이 숨겨져있고 그 종적을 세상 사람들이 모르도록 행세 하였기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것이다.
어진 사람이 애초에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저 그 시대에 도리에 합당하게 행동하였고 의리에 맞게 실천했을 따름이다.
중국 은(殷)나라의 ①백이(伯夷) . 숙제(叔齊)와 같이 그 명성을 나타낼 만한 일을 실천하여 천하 후세에 그 뜻과 행적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없도록 하였기에 한마디로 인인의사(仁人義士)라 하였으니 이亨것이 이른바 그 명성을 나타낼만한 이름이다.
중국 한(漢)나라의 ②엄광(嚴光)과 진(晉)나라의 ③도잠(陶潛)은 그 명성을 나타낼만한 일도없이 이름을 남겼으므로 천하 후세에 그 뜻과 행적이 소상하게 알려지지 않아 평범하게 숨어사는 높은 인격자라고 일컬어지니 이것이 이른바 명성을 남길 만한 일이 없니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긴 사람이다.
그러나,
명성을 후세에 남긴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본인이 그렇도록 노력해서 얻을 수도 있으나 자신의 행젇을 숨겨 왔음에도 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반드시 의리를택함에 매) 유집우 세밀하고 도리를 지키는데 아주 강직해서 이러한 일을 싷천함에 있어서 자신에게 다짐을 하는 일은 할 수 있어도 타인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일은 하지 못한다. 병성을 남기려고 노력하는것과 명성을 남기고자 하는것이 같으나 마음쓰는 괴로움이 쉽게 알 수 있는 의리를 잡고 태연하게 지나 가는 것보다 갑절이나 더함을 누가 알 것인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어 세조가 등극 할 때를 당해 도촌(桃村) 이선생이 평시서령을 버이고 소백산(소白山) 속에 들어와 평생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 참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선생의 나이 21세였다.
또한 오품(五品)이란 미관이라 집현전(集賢殿) 제현(諸賢)들과 함께 문종(文宗)의 유탁(遺託)을 받고사 어린 단종(端宗)을 보필하는데 생사를 걸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벼슬을 한다해서 잘못된일도 아니요 벼슬을 하지 않는다 해서 명예로운 일이 되지도 못하는데 자신을 더럽힐까봐 질풍과도 같이 벼슬을 버리고 달아나 멀리 숨었으니 어찌 영광과 도참의 행적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른바 의리를 택함에 매우세밀하고 도리를 지키는데도 심히 강직해서 이런 일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일은 할 수 있어도 남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잘못된 말일까. 당시 선생의 심사가 괴로웠음을 내가 추측 할 수 없기에 언급하지 않겠다.
선생은 훈신(勳臣) 약관(弱冠)에 이미 벼슬을 하였고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때 교분이 매우 두터워 선생으로 하여금 벼슬에 있게 하였다면 그 앞날을 어떻게 짐작 할 수 있었겠는가.
④자은(子隱)께서는 ⑤“벼슬도 사양 할 수 있으며 예리한 칼날을 밟고 지나갈 수도 있다.[爵祿도 可辭也며 可蹈也]라 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실천하기에 어려운 일이라 하였거니와 [예리한 칼날도 밟을수 있다]는것은 때로는 한때의 감정에 북받혀서 할 수도 있겠거니와 벼슬과 국가에서 주는 봉록(奉祿)을 사양한다는 것은 평생 굶주림을 참아내며 벼슬길에 나아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뜬구름과 같이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행하지 못 할것이다. 이런관점에서 말한다면 선생의 사적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세조가 늘 선생의 안부를 묻고 음식을 보내면서도 벼슬길에 나오도록 억지로 권하지 않은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 또한 엄광(嚴光)의 참뜻을 알았던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그 뜻을 이루게 한 것과 동일한 것이였던가. 그때에 선생의 장인인 ⑥김문절공(金文節公)은 영주(永住)에 물러나 있었으며 나라에서 이조판서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을 때였기에 필시 선생께서는 서울을 떠나 천리길인 ⑦죽령(竹嶺)을 넘어 김공의 향리 근처에 와서 늙으료 했던것이리라.
거처할 집을 지었는데 동남쪽은 벽으로 막았고 북쪽은 들창을 내었으니 그곳은 곧 영월(寧越)땅으로 단종(端宗)께서 귀양가 계신 산천이였다.⑧
선생은 94세를 향수(享壽)하였는데 이 땅에서 70여년을 계셨으니 이상의 서술한 것으로 선생이 가지셨던 안타까운 심정을 설명 할 수 있겠는가.
후손 ⑨경석(慶氵+奭)이 선생의 우사(遺事)를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나에게 가지고 와 서문을 지어 선생의 행적을 밝혀 달라고 하였다. 이 유사를 보니 선생을 경모하는 마음과 또한 일생을 그렇게 보내신데 대하여 감탄을 금지 못하여 삼가 위와같이 써서 보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겸(兼) 오위도총부(五衛都總府)
부총관(副摠菅 완산(完山) ⑩이헌경(李獻慶) 삼가쓰다.
∎註 ∎
① 백이숙제(伯夷叔齊 : BC1100년경 중국 고재 은왕조(殷王朝) 시(時) 고죽군(孤竹君)의 두아들 뒤에 주(周)나라로 가 문왕(文王)을 섬겼으나 그가 죽고 武王이 왕위에 올라 은(殷)나라를 치려하자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드디어 이들 형제는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다가 굶어 죽었다.
당대(唐代) 한유(韓愈)의 백이송(伯夷頌)이 유명하다.
②엄광(嚴光) 字 子陵 후한(後漢) 세조인 광무제(光武帝)의 벗.
③도잠(陶潛) : (365 ~ 427)
중국 동진대(東晉代)의 대시인(大詩人) 字 淵明 號 五柳先生
諡號 靖節先生 道家와 儒家의 思想을 겸하여 수용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양지성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深나라 昭明太子가 편찬한 “陶淵明輯”이 전 한다.
④子恩 : 중국 戰國時代 魯나라의 사상가, 孔子의 손자, 曾子에게 학문을 배워 孟子에게 연걸 해 줌.“中庸”은 이설이 많기는 하나 그의 저술로 본다.
⑤“中鑛제 9장”
⑥金文節公 撫松軒 金淡 [태조16(1416) ~ 세조10(1464)년]
字 臣源 宣城人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갔다. 이순지(李純之)등과 함께 조선(朝鮮) 이학(易學)의 기본이된 “칠절신외편(七政算外篇)”을 저술하였다.
⑦竹嶺 : 경북 영풍군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의 경계를 이룬 해발 689m의 고개,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급시대(158)부터 이 길이 열린 이래 영남에서 서울로 내왕하는 주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⑧공북헌(拱北軒)을 말함. 봉화읍 도촌리 사제(沙堤)마을 동산 서쪽에 있다.
지세는 동남향으로 짓는것이 마땅한데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기문(記文)을 지었다.